다시 이 길을 - 마라톤
삶이 그러하다.
한때는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. 삶이 그러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데 까
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. 세상 부러움 없이 마음껏 먹고, 자고 싶은 대로 자고, 사랑하고 싶을 때 사
랑하고, 삐치고 싶을 때 삐치고, 화내고 싶을 때 화내고, 웃고 싶을 때 마냥 웃을 수 있다고 해서 행복
은 아니다. 이제야 알겠다.
행복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다. 인간은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심이나 이기심 때문에 불행하다. 자
신의 손해를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행복 할 수 있다. 그것은 배려와 겸손에서
자란다.
인생은 마라톤이다. 아니다. 마라톤은 인생이다. 마라톤을 왜 하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다. 그것은 인
생이기 때문이다. 나는 그렇게 출발선에 섰다. 아마 행복을 찾으려는 시도였을 것이다. 집에서 빈둥빈
둥 하루를 보내면 나름대로 행복할 텐데, 왜 이 험한 출발선에 섰을까.
진정한 행복은 더하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, 빼기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
라. 그래, 나에게서 나를 빼자. 얼마만큼 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덜어 낼 수 있을 만큼 덜어내자. 거
기서 작은 행복을 찾자.
세상이 그런 줄 알았다
부모님의 삶을 빌어서 태어난 몸이어서 내 삶은 부모님께서 챙겨주시는 것이었다. 배고프다고 울면
젖을 물리고, 비를 맞으면 우산을 받쳐주셨다. 처음 출발하여 얼마간은 힘들지 않다. 다른 주변 사람들
과 부딪치기도 하지만 부모님께서 내려주신 자양분으로 충분히 견딜만하다. 자칫 보호가 지나친 탓에
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우쭐거리다가 엎어질 수도 있지만 씩씩하게 잘 견딘다.
5킬로미터를 지나면서 호흡이 조금 거칠어진다. 유년을 지나 청소년기를 맞으면서 사춘기의 위기가
잠시 오지만 부모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힘이 더 크다. 거친 호흡을 잘 다독이며 묵묵하게 앞을 향해
달린다. 세상이 그런 줄만 알았다. 내가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까지나 나를 밀어주고 당겨주는 부모님
이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 알았다.
삶은 기복의 리듬이다
10킬로미터를 지나면서 차츰 삶이 녹녹치 않다는 자각이 느껴진다. 아직까지 청년기의 삶이라 부모
님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지만, 내 자신 스스로 이루고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. 그만큼 더 경쟁도
치열해진다. 마라톤에서 끝까지 완주 할 수 있을지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구간이다.
13킬로미터 지점에서 잠시 회의가 온다. 왜 뛰어야 하나. 이렇게 뛰어서 무엇을 얻고자 하나. 입술을
깨물었다. 입을 벌리면 내 삶의 의미가 새나간다. 그만큼 나의 삶은 퇴색될 터이고 나는 주저앉을지도
모른다. 가쁜 호흡을 몰아쉬면서도 굳게 입을 다물고 다짐을 세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.
15킬로미터 이후에는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. 방황하던 삶을 벗어나서 가정을 꾸리고 멋진 아들
딸도 얻게 되었다. 막연하게나마 미래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있었다. 세상에 태어나서 생명을 이어갈
수 있다는 기쁨과 그 의무감에 힘겨운 레이스를 잊을 수 있었다. 조금만 더 가면 반환점이라는 안도감
은 무한한 에너지다.
삶은 이렇게 기복의 리듬을 타고 흘러간다.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작은 애로를 겪지 않고 살아 갈 수
는 없다. 그냥 평탄했다면 지루해서 금방 지쳤을지도 모른다. 힘들 때마다 불평을 할 게 아니라 그 리
듬을 즐길 수 있다면 무난하게 완주 할 수 있을 것이다.
울퉁불퉁하면 어떠랴. 내 삶인 것을.
인생의 반환점에서 또 다른 시작이다.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면 정말 실수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
수 있다고 공언한다. 인생이 다시 주어지지도 않을뿐더러 다시 주어진다 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희박
한 거짓말이다.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면 내 삶의 길은 또 다른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.
딱 한 번 하프마라톤을 뛰어본 경험이 있다. 그때를 생각하면 도저히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겠지
만, 지금 나는 풀코스라는 인생의 반환점에 와 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다. 기필코 끝까지 가야만 하
는 운명을 짊어진 새로운 길이다. 되돌아보면 긴 세월이다. 인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슴
에 빼곡하게 새겨왔다. 틈이 없어 보이지만 내다보면 아직도 여백이 많은 인생이다.
25킬로미터를 지나면서 호흡은 견딜만한데 발목이 뒤틀리고 몸도 제 멋대로 구겨지는 느낌이다. 반
환점을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몸이 괴로우니까 마음에도 갈등이 인다. 나는 왜 이 길을 가는
것일까. 울퉁불퉁한 길에 서 있는 나는 되돌아 갈 수도 없다. 아이들에게 젖도 물리고 우산도 받쳐 줘
야 한다. 사회도 불투명하고 아이들 뒷바라지도 무겁지만 내 삶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다.
음수대에서 목을 축이려고 잠시 달리기를 멈추었다. 멈춰지지가 않는다. 그동안 뛰어 오는데 길들여
진 다리가 자꾸 앞으로 나가려한다.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. 뒤 돌아 볼 겨를이 없구나. 그래 뛰자. 내게
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해서 뛰어왔으니까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뛰자. 포기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
뛰자.
짧은 햇살에도 웃을 수 있다
가끔은 뒤돌아보는 삶이다. 30킬로미터를 달렸으니 추억할 일도 그만큼 많아졌다. 내게 남겨진 인생
은 덤이다. 끝까지 달릴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지라도 아쉬움은 덜하다. 다만, 고집스럽게
지켜왔던 내 삶의 방식만이 최고라고 고집부리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.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너그
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결승선에서 멋지게 테이프를 가슴에 걸칠 수 있으리라.
꿈이 있었다. 짧은 햇살이지만 따사로운 미소로 석양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싶었다. 나는 지금 그
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.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남에게 해코지 하지 않고 지
독한 설움에 떨지 않았으니 이만큼 무사하게 왔는지도 모른다. 가을처럼 쓸쓸한 이 길을 편하게 뛸 수
있어서 좋다.
이제 두려움 없이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. 세상에 태어난 은혜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. 손자들 재롱에
푹 빠져서 묻혀있기 보다는,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장식을 탐하며 세상에 독설을 내뱉기 보다는 검소
하고 겸손함으로 순응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.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열정적으
로 몸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.
35킬로미터. 세 시간 반 넘게 뛰었다. 몸도 마음도 지친다. 이제는 1킬로미터가 10킬로미터처럼 더디
다. 뛰어도 길이 줄어들지 않는다. 자는 듯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노인들의 입버릇이 헛말이 아니었구
나 생각된다. 37킬로미터 지점에서는 그냥 퍽 주저앉고 싶었다. 살만큼 살았으니 그대로 주저앉아도
여한이 없을듯하다.
그래도 그냥 주저앉지 못하고 뛴다. 내 삶의 물음을 다 알지 못하였으니 뛸 수밖에 없다. 조금만 더
뛰자.
결승점에서 다시 이 길을
원 없이 뛰었다. 빨리 이 길을 벗어나고 싶다. 누구를 위하여 무작정 뛰었는지 모르지만, 겁 없이 출
발선에 서서 두근거리던 마음을 재우며 시작했던 내 삶의 여정에 종착점이다. 다시 마라톤을 뛰 라고
하면 뛸 수 있을까. 그건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으니 뛸 수밖에 없지 않는가. 더 잘 뛸 수 있다는 보장
은 없다.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.
연습이 없었던 삶에서 나는 얼마만큼 행복 할 수 있었는가. 자신도 모른다. 자신이 자신을 얼마만큼
덜어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. 행복은 기준도 없고 계측할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. 다시 뛰어야 한다면
행복 같은 건 묻지 말고 그냥 뛰자.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냥 웃으며 뛸 수 있으면 좋겠다. 그것이 행복
일까.
* 일 시 : 2008년 11월 2일
* 대 회 명 : 2008 중앙서울마라톤
* 참가분야 : 풀코스(42.195km) - 참가번호 : 9699
* 공식기록 : 4시간 8분 10초
* P.S
내게는 첫 도전이었다.
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결코 쉽게 생각한적은 없다.
겁 없이 도전을 내밀었고..
나는 결승점을 밟았다.
내 인생에서 또 다른 힘이 되리라 믿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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